애플피킹: 가장 높은 곳의 달콤함, 그리고 낮은 곳의 유혹

2024년 10월의 보스턴은 유난히 채도가 높았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 영아부 가족들과 함께 Tougas Family Farm으로 향했다.
뒷좌석 카시트에는 두 살배기 아들이 왕처럼 앉아 창밖을 구경하고 있다. 아이 하나 챙기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육아의 무게를 온전히 즐기기엔 여유가 부족했던 초보 아빠 시절의 기록이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손목에 밴드(Wristband)를 찼다.
이 행위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마트 진열장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역추적하는 체험(Experience)이자, 가을이라는 계절을 오감으로 저장하는 의식이다.

과수원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트랙터가 끄는 Wagon에 올랐다.
덜컹거리는 수레 위에서 바라본 과수원은 놀라울 정도로 정연했다.
끝없이 펼쳐진 사과나무들이 완벽하게 오와 열(Rows and Columns)을 맞추고 서 있다. 자연의 무질서함 속에 인간이 강제로 부여한 기하학적 질서. 수술방의 정돈된 기구들을 볼 때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의 타겟은 Honeycrisp.
사과계의 에르메스라 불리는, 단단한 조직감과 당도를 자랑하는 품종이다.

나무 앞에 서니 경제 경영 서적에서 수없이 인용되던 단어가 눈앞에 실체화된다.
‘Low Hanging Fruit (가장 낮은 곳에 열린 과일)’.
비즈니스나 코딩의 세계에서는 ‘가장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나 ‘즉각적인 성과’를 뜻한다. 보통은 긍정적인 의미로, 리소스를 적게 투입해 먼저 공략해야 할 대상을 말한다.

하지만 진짜 과수원에서의 현실은 달랐다.
손 닿기 쉬운 낮은 가지의 사과들은 이미 남들이 다 따갔거나, 작고 상처 입은 것들뿐이다. 쉬운 길에는 늘 경쟁이 치열하고 보상은 적다.
진짜 상품(High Quality)을 얻으려면 사다리라는 도구를 이용해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중력을 거슬러 올라간 나무 꼭대기, 잎사귀 뒤에 숨어 햇빛을 독점하고 있던 굵은 녀석들이 보였다.

“아빠, 저거!”
아래에서 아들이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킨다.
가장 높고 붉은 것을 따서 내려왔다. 쓱쓱 닦아 한 입 베어 문다.
조직이 치밀해서 씹는 소리부터 다르다. 입안 가득 터지는 과즙은 마트 냉장칸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엔트로피를 가진다.

아이는 자기 몸통 만한 봉투에 사과를 꾸역꾸역 담는다.
직접 딴다는 행위가 주는 도파민은 아이에게도 강력한 모양이다.

수확의 로직이 끝나자,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세상이었다.

매표소 근처로 돌아오니 농장 동물들과 놀이터가 보였다.
염소(Goat)와 양(Sheep)들이 펜스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만 자란 아이에게는 털 달린 네 발 짐승 자체가 충격이자 환희였다.

사료 자판기에서 먹이를 뽑았다.
아이는 무서움 반, 호기심 반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염소의 거친 혀가 아이의 손바닥을 핥고 지나갔다.
“악!!!” 놀라서 넘어가는 아들의 비명. 아빠보고 대신 하라고 하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자기가 직접 주기는 싫은가 보다.
놀이터 미끄럼틀을 수십 번 오르내리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뛰어놀았다. 사과를 딸 때보다 더 높은 도파민 반응이다.

마무리는 역시 Apple CiderDonut.
갓 튀겨낸 도넛의 기름진 향과 시나몬 설탕, 그리고 달콤한 사이다가 노동으로 소진된 글리코겐을 보충해 준다.

돌아오는 길, 지쳐 잠든 아이의 손에서 동물 사료 냄새와 풋내 섞인 사과 향이 났다.
효율성을 따지자면 $4.99짜리 마트 사과가 정답이겠지만 (물론 Honeycrisp는 이보다 더 비싸다!), 우리는 오늘 기꺼이 비효율을 샀다.
사다리 위에서 본 10월의 하늘과, 사과 나무 사이에서 설레던 우리 가족의 추억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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